입력2006.01.08.
국내 최대 타공업체 경영자 ‘우뚝’기술력 바탕으로 인천신공항 등에 시공… 7개국에 수출도
약력: 1961년 경북 청송 출생. 73년 고아가 됨. 신문 및 구두배달. 75년 동신공업사 사환으로 입사. 82년 성실타공 창업. 94년 중앙대 경영대학원 AMP과정 수료. 성실타공 회장(현)
서울 행당동에 있는 한양대에서 성수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성동교가 있다. 이 성동교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중랑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돌다리가 보인다. 살곶이다리다.이곳은 옛날 장안에서 아차산 방면으로 갈 때 지나다니던 교통의 요충지였고 해방 이후에는거지나 넝마주이들이 움막을 짓고 살던 지역이다. 지난 1970년대 중반 이동훈씨는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 61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11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상경했으나 2년 뒤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됐기 때문. 처음 상경해 응봉동 산꼭대기 판잣집에서 살면서 신문배달과 구두배달(닦은 구두를 손님에게 갖다주는 일)을 했지만 부친을 여의자 판잣집에서조차 살 형편도 안돼 살곶이다리 천막집으로 이주한 것.
이곳에서 남들이 중학교에 다닐 나이인 15세 때 세 번째 직업을 가졌다. 중랑천변에 있던 타공(打孔)회사 동신공업사의 사환이었다. 타공은 철판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말한다. 타공제품은 주정회사의 찌꺼기를 거르는 공정에서 소음방지재, 천장재, 흡음판, 클린룸, 자동차필터, 폐수처리기계 등에 다양하게 사용된다. 그의 직책은 사환이었으나 초창기엔 월급도 없었다. 열심히 심부름한 뒤 밥을 얻어먹었다.
이곳에서 타공 일을 배운 뒤 중고기계 1대로 사업을 시작한 이동훈 회장(44)은 지금 국내 최대 타공업체 최고경영자가 돼 있다. 서울 대방동, 경기도 이천과 평택, 그리고 시화공단에 번듯한 공장을 갖고 있다. 대방동 전철역 부근의 요지에 200평 규모 공장을 비롯, 이천에는 부지 4,200평ㆍ건평 500평 규모, 평택에는 부지 3,000평ㆍ건평 500평 규모의 공장을 갖고 있으며 2005년에는 시화공단에 부지 700평ㆍ건평 600평규모의 공장을 또다시 신축했다.
이들 공장은 요즘과 같은 불경기에도 하루 3시간씩 잔업을 한다. 인근 중소기업 공장들은 오후 6시께는 기계소리가 모두 멈추지만 이들 공장은 거의 매일 오후 9시까지 작업을 한다. 이들 공장에서 만들어진 타공제품은 인천신공항과 고속전철 광명역사ㆍ천안역사, 대형실내경기장인 광명경륜장ㆍ대전월드컵경기장 등에 시공돼 있다.
이들 대형건축물은 소음방지가 필수적이다. 스테인리스나 철판, 알루미늄 등에 원형으로 수많은 구멍을 뚫은 뒤 소음재를 붙여 시공을 하면 실내에서 생기는 소리의 상당부분이 흡수된다. 소득수준이 높아질수록 소음방지에 대한 욕구가 커진다. 따라서 소득수준이 올라갈수록 타공제품의 수요도 늘어나게 되는 셈이다.
이회장은 “해마다 타공제품 시장이 15~20%씩 커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성실타공을 약 100개에 이르는 국내 타공업체 중 최대 기업으로 키웠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 브라질 등 7개국에 연간 500만~600만달러어치를 수출한다. 미국의 경우 그동안 나무로 만들던 가옥의 낮은 울타리를 타공제품으로 바꾸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나무의 경우 비를 맞으면 페인트가 벗겨져 흉하게 되고 오래되면 썩는 단점을 갖고 있다. 반면 알루미늄이나 스테인리스 타공제품으로 울타리를 만들면 이런 단점을 없앨 수 있다. 게다가 이들 타공제품에 분체도장을 하면 외관도 무척 아름다워진다.
이회장은 어떻게 무일푼에서 성공한 중소기업인이 됐을까. 그는 동신공업사에서 사환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기술을 익혔다. 타공은 철판을 비롯해 스테인리스, 구리, 황동, 알루미늄 등 갖가지 재질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구멍은 용도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다르고 배열과 간격도 다르다. 이를 정교하게 가공하려면 정밀기술이 필요하다. 좋은 타공제품은 구멍이 일정하고 이들간의 간격도 같아야 한다. 구멍이 막히면 타공제품을 사용한 기계의 모터에 과부하가 걸려 고장이 나거나 불이 날 위험성이 커진다.
게다가 구멍 주위에 미세한 철판조각이 삐죽삐죽 튀어나오지 않고 매끄러워야 한다. 이 평탄도는 타공기계의 금형을 제대로 만들 때 나오게 된다. 수년간 궁리한 끝에 좋은 타공제품은 타공기계의 타공핀이 좌우한다는 것을 터득했다. 열처리가 잘된, 단단한 타공핀은 구멍을 깔끔하게 뚫어주고 뒷면도 매끄럽게 해준다는 것을 간파한 것. 이를 위해 타공핀을 강하게 열처리하는 기법을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감히 사환 주제에 기계를 만진다”며 직장선배들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타공기술을 익혔고 그 덕분에 입사 6년 만에 공장장이 됐다. 하지만 얼마 안돼 회사는 부도가 났다. 당시 동신공업사의 사장은 그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 그에게 중고 타공기계를 1대 줬다. 이를 밑천으로 삼아 대방동 전철역 옆에 5평짜리 공장을 얻어 성실타공을 세웠다. 이때가 82년. 한동안 주문이 들어오지 않자 그는 문을 닫고 공장이 많이 있는 영등포 일대의 전봇대와 공장 담벼락에 포스터를 붙여가며 수주에 나섰다.그래도 주문이 거의 없자 이때부터 타공제품을 많이 쓰는 주정공장들을 찾아다녔다. 공장경비로부터 쫓겨나기 일쑤였고 어렵사리 공장문을 통과해도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영등포 소재 주정업체인 서영주정으로부터 “당신이 진짜 제대로 된 타공기술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야겠다”는 연락을 받고 대방동 공장에서 시연한 끝에 첫 주문을 받게 됐다. 이때까지 주정회사가 사용하는 타공제품 분쇄기망은 국내 기술이 뒤져 모두 수입해 쓰고 있었다. 첫 주문을 받은 뒤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서영주정이 고정거래처가 되면서 매달 주문이 이어졌다. 또 서영주정의 소개로 진로, 제일제당 등 많은 업체들도 주문을 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거래처들이 확보되면서 회사는 급속도로 성장해 갔다. 제품의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현대, 삼성전자, 미원, 만도기계 등 대기업들의 주문이 줄을 이었다. 5년 후에는 세 들어 있던 대방동의 공장건물을 통째로 샀다.자동화 시설을 갖추기 위해 86년 경기도 이천의 부도난 공장을 인수했다. 타공기술이 앞선 일본과 독일 등의 공장들을 돌아본 뒤 선진국일수록 타공제품을 많이 사용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건축물이 고급화되면서 내장재로도 많이 쓰이고, 지하철이나 고속철도, 그리고 공항시설들을 건설하는 데도 사용됐다.
그는 국내에서도 타공제품 사용이 늘어날 것으로 확신하고 자동화 설비를 갖췄다. 2대의 기계를 완성하자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지하철 공사와 각종 경기장 공사가 이어지면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89년 미국의 DB ENG와 5년 수출계약을 맺었다. 제품의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이 수출계약은 5년 더 연장됐다. 이후 적극적으로 수출판로를 개척했다. 이후 인천신공항 건설과 국내 폐수장 건설 등 굵직굵직한 공사들이 줄을 이으면서 회사는 연 50~100%씩 성장했다.
그는 정장 차림이든 캐주얼복 차림이든 주머니에 항상 아이디어를 적어두는 수첩을 넣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메모한 뒤 개발에 몰입한다. 이론이 아니라 실험과 실천을 통해 신제품을 개발한다. 나중에 전문가에 의뢰해 이론적인 뒷받침을 받는다. 그가 개발한 제품은 5종. 특허는 출원을 합쳐 17건에 이른다.
제품 중에는 회사 발전의 기틀이 된 타공기계와 숨쉬는 장독대 뚜껑과 냉장고 탈취제 등이 포함돼 있다. 특히 10여년 쌓은 경험을 살려 자동식 타공기계를 개발해 발명특허를 획득했고 이 기계 덕분에 국내 최대 타공업체로 부상할 수 있었다. 성실타공에는 창업 초기부터 동고동락을 해 온 사람들이 많다. 약 50명에 이르는 직원들은 모두 이 회장과 끈끈한 인간관계로 맺어져 있다.
그는 사업만 크게 벌이고 있는 게 아니다. 본사가 있는 대방동 주변의 가난한 초ㆍ중ㆍ고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나눠주고 소년소녀가장이나 독거노인 등을 위해 연간 약 3,000만원을 기부한다. 생색을 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그는 사업을 시작한 지 5년 후인 지난 87년부터 20년 가까이 두 달에 한 번씩 불우이웃돕기성금 조로 동사무소에 100만~200만원씩을 전달해 왔다. 또 몇몇 중소기업체 사장들과 함께 경기도 등지의 고아원과 양로원을 종종 찾아가 도움을 준다.
고아들 10여명을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이들을 돕는 것은 배고팠던 시절 “형편이 나아지면 내가 남들을 도와주겠다”고 혼자 결심한 내용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서울 신길동 반지하 셋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단둘이 살아가던 초등학교 6학년짜리 꼬마를 도와 대학(한양대 공대)까지 마치도록 후원하기도 했다. 그 청년은 나중에 성실타공에 입사하려고 했지만 이회장이 “더 큰 곳에서 꿈을 키우라”며 받아주지 않았고 결국 LG연구소에 입사했다.
“저는 배운 게 없지만 어려운 환경의 사람이 인재로 자라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게 기쁩니다.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남을 돕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만큼 저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겁니다.” 이회장의 행복론은 간단명료했다.
김낙훈 편집위원 nhkim@kbizweek.com